17. 인레-3 (1.16.)

어느덧 해가 지고 드디어 지는 해를 보러 떠났다. 어디서 일몰을 감상하는 걸까? 우리 보트는 한참을 달리다가 호수 가운데에 멈춰섰다. 꽤 오랜시간 달려온 덕에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여기서 볼 거예요.”

여기가 우리 기사의 일몰 명소였나보다. 운전 기사들 마다 각자의 명소가 있겠지? 우리 배가 도착하고 몇 척의 배들이 지나가긴 했지만 여기서 일몰을 감상하는 팀은 우리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달릴 때는 몰랐는데 가만히 기다리고 앉아있으니 시간이 꽤 느리게 갔다. 잠시 후 고기잡이 배들이 우리 보트 주변에서 고기 잡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H아저씨 말로는 저걸 우리 보라고 하는거며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면 나중에 사진료를 요구한다고 했다. 그래도 이걸 놓칠 순 없지,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아니나다를까 그 순간을 포착하고 고기잡이 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사실 흔들려서 사진을 제대로 건지지도 못 했는데 사진료를 내려니 아까웠지만…. 돈을 받자 그 사람들은 몇 가지 포즈를 더 지어주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재밌네. 우리끼리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물에서 진짜 셀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올라왔다.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검은 색이라 그런가.. 하얀 벌레가 더 잘 보였다. 으악. 이런 날파리같은 벌레들을 겁내지는 않아서 보이는 대로 잡을 수 있었는데, 이건 내가 졌다. 잡기에는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쫓아내려고 계속 다리를 털었는데 나중에는 그냥 포기했다. 그래.. 너네도 같이 일몰을 보자꾸나.

여유로웠다. 이렇게 다음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멍하니 시간을 보낸 게 정말 얼마만인지. 더군다나 양곤에서의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나니 더욱 달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평소에 항상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일종의 강박인데 (내 나름의) 의미있는 일을 하지 않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면 괜히 죄책감이 느껴지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하고 뭔가 생산적이고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한다고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을 한다. 하지만 내 몸은 그렇게까지 부지런하지는 않아서 이따금 게으름을 부리고, 그러면 나는 자책을 한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바에는 그냥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해서 피곤해도 니가 해야 할 과업을 해내라며 스스로를 부추긴다. 쉴 때 넷플릭스를 보고 쉴 수도 있지 않은가. 즐기라고 나온 서비스고 나도 재미있게 보기 위해 그걸 결제하는 건데 말이다. 그런데 나는 주말에 넷플릭스를 볼 때면 ‘아 이러면 안되는데, 이 시간에 이렇게 나태하게 늘어져서는 안 되는데.’하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이야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완전히 그런 생각을 지운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배 위에서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정말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온전한 여유였다. 이 때 느낀 이 감정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깊이 박혀있다. 텅 빈 시간을 이렇게 온전히 즐긴 적이 있던가. 처음으로 느껴본 이 느긋함이 마음에 들었다. 머릿속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지만 어느새 그런 것들은 별 대수롭지 않은 것들로 느껴졌다. 마음이 지금 이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왜 사람들이 혼자 여행에서 뭔가를 느끼고 오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이전까지는 여행을 다녀와서 내 인생이 달라졌어요! 따위의 말들에 코웃음을 치는 편이었는데 거창한게 아닐지라도 그냥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면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다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했다. 일상의 소중함.. 무탈하고 평범한 하루의 소중함은 느낀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나의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이런 온전한 여유를 느낄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건 한참이었는데 해가 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미얀마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감상한 일몰이었는데 참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좋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우리는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물가라 그런가 해가 지니 꽤 쌀쌀했다. 인레는 작은 마을이어서 사실 해가 지면 할 게 별로 없었다. 양곤처럼 밤에 구경하거나 즐길거리가 있는 편도 아니었고. 그래서 H아저씨의 제안이 꽤 반가웠다.

“우리 저녁 같이 먹을까요?”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고 아쉽게도 M은 같이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M은 한달 간의 여행으로 여자친구와 다툼이 생겨 사이가 좀 안 좋은 상태였는데 오늘 밤 통화를 좀 길게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흥미진진한 일화들이 많아서 더 듣고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렇게 M과 인사를 하고 H아저씨와 나는 마을로 들어갔다. 어떤 식당에 가야할까?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적당해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나는 제대로 된 미얀마 음식을 먹어보지 못해서 특히 샨누들이 참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저씨의 추천을 받아 메뉴판에서 여러가지를 주문했다. 음식들은 다 맛있었다.

“동행 어떻게 구했어요?”
“저요? 그냥 카페보고 M님이 그 때 간다고 하셔서 저도 일정이 맞아서 구했죠!”
“참 겁도 없네요, 동행 구할 때 겁나지 않았어요? 조심해야 해요.”
“네, 왜요?”
“여자 혼자서 그렇게 가는데 동행 구할 때 아이디도 검색해보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그렇게 해야죠.”

H아저씨는 약간 딸 걱정하는 느낌과 부장님이 나를 걱정하는 느낌으로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본인은 아이디 구글링까지 해본다고 하시며 여행 나오면 한국인을 제일 조심해야 하고 또 나보고 정말 운이 좋다고 했다. 양곤에서도 그렇고 이번 동행도 그렇고. 나는 네, 라고 했지만 사실은 속으로 그런가? 싶었다. 물론 조심해서 나쁠 건 없고 나는 여행 와서는 되게 조심성 없게 행동한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래, 정말 저 말처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이런 저런 얘기를 더 나누었는데 H아저씨도 나와 같은 일을 해서 그런가 이야기가 잘 통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H아저씨가 어차피 밤에 할 것도 없는데 괜찮으면 맥주 한 잔하자고 하셨다. 나도 뭐 딱히 밤에는 할 일도 없고 저런 조언을 해 준 H아저씨가 꽤 믿음이 갔기 때문에 그러자고 했다. 괜찮은 맥주집을 찾다가 마을 공터에서 야시장이 펼쳐진 것을 발견했다! 와우! 우리는 야시장을 구경했다. 먹거리도 많았고 어느 동네 야시장과 비슷하게 수공예품들이 많았다. 나는 돌아가서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 작은 파우치를 몇 개 샀다. 거기서 팔고 있는 꼬치들도 꽤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우리는 배가 불렀고 여기보다는 일반 가게가 더 위생적일 것 같아 야시장은 패스했다. 계속 걷다가 내 호텔 주변으로 오게 되었고 나는 온 김에 짐을 좀 놔두고 싶어서 잠깐 방에 들렀다가 와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H아저씨가 호텔에 바가 있냐고 가격을 보고 괜찮으면 내가 묵는 호텔 바에서 먹자고 했다. 나로서는 꽤 괜찮은 제안인 것 같았고 그래서 내가 방에 간 사이에 아저씨가 바의 가격을 확인하고 온다고 했다.

그런데 역시 호텔은 호텔인가 가격이 꽤 비싸서 그냥 호텔 앞에 있는 작은 술집에 들어갔다. 뭔가 서양 외국인들이 많아서 혼자 괜히 좀 쫄았지만 적당히 시끄럽고 분위기가 괜찮았다. 우리는 안주와 맥주를 시켰다. 카메라를 방에 두고 와서 사진을 못 찍었고 그래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미얀마 맥주를 시켰는데 술을 잘 못하는 나도 적당히 즐길 수 있을만큼 술이 세지는 않았다. H아저씨와 정말 별의 별 얘기를 다 했는데…. 나는 이날 밤 인간 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