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하노이-2 (1.12.)

좁고 답답한 방에서 눈을 떴다. 아, 오늘 뭐하지?

 

어제 밤늦게, 한국 시각으로 치면 거의 새벽 2시가 넘어서 잠들긴 했지만 여행을 왔다는 설렘 덕분인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오늘 뭐하지? 였다. 탕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 깨지는 바람에 나는 오늘 혼자였다. 그 말은,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6번째나 되어서야 혼자 다니다니. 새로운 경험이 주는 묘한 설렘에 얼른 이 방을 나가서 하노이를 떠돌고 싶었다. 오늘 여행에서 나는 (훗날 아주 후회할) 한 가지 선택을 했다.

'로컬처럼 다니리라!!'

나는 하노이에서 관광지를 돌아볼 것도 아니고 정말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여행 필수 아이템 미러리스를 가지고 가지 않았기로 결심했다. 사진 찍는데 너무 많이 몰두하고 싶지도 않았고, 괜히 두리번두리번 사진을 찍는 모습이 여행자 같이 보일 것 같았다. 물론 현지 사람들은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든 안 들고 다니든 나를 여행자로 볼 확률이 90%이지만 말이다. 전날 밤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아침이 되어도 날씨가 맑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호안끼엠 호수로 갔다. 물안개가 끼어있는 모습이 꽤나 운치가 있었다. 생각보다 날은 쌀쌀했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여기가 하노이인데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리!

'와! 진짜 호안끼엠이다!'

사실 호안끼엠 호수를 빙빙 돈 적도 있을 정도로 그닥 낯설지 않은 장소였지만 입가에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하노이의 아침. 많은 오토바이들!

 

내가 묵었던 에어비앤비는 아침을 제공하지 않았기에, 나는 아침부터 무엇을 먹을지 찾느라 아주 바빴다. 뭔가 맛집에 가고 싶은데 그게 로컬 맛집이었으면 했다. 나름 하노이 몇 번 와봤다고 그런가 관광객들이 가는 곳이 아닌 로컬 사람들이 가는 곳을 가고 싶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생각나는 건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하노이에 오기 전 저기 다 가봐야지 하고 프로그램을 아주 재밌게 봤던 터라 그때 보았던 음식들을 떠올려보았다.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음식은 '퍼 러이'. 백종원 아저씨가 엄청 추천을 했던 아롱사태 부위를 넣은 쌀국수였다. 구글맵으로 장소를 찍고 천천히 걸었다.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리는 오토바이들, 그 사이로 여유롭게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외국어까지! 신이 났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아 여기가 여기구나! 하며 이전에 와봤던 기억이 떠올라 반갑기도 했다. 사실 하노이 시내의 지도를 자세히 본 적이 없었는데, (항상 목적지를 찍고 그곳만 찾아서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지도와 주변을 비교해가며 걸으니 하노이 시내가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한 2~30분을 걸었을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 어라? 근데 내가 방송에서 본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여기라고 했는데. 구글 리뷰에도 백종원 아저씨 이름이 있는 걸 봐서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내가 도착한 곳은 방송에 나온 모습과는 다른, 내 기준으로는 내가 평소에 가지 않을 로컬 식당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로컬 식당을 고르는 기준은 뭐 별거 없다. 첫째, (내 기준) 위생적일 것. 둘째, 가격이 명시되어 있을 것. 그런데 내가 도착한 이 곳은 뭔가 배탈이 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쩌지, 그래도 저기라는데. 저기 갈까? 아닌가, 가지 말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 옆집으로 들어갔다. 이유는 별거 없는데 조금 덜 바빠 보였고 조금 더 위생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곳이 맛집이니 더 바쁜 곳으로 가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간 곳도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쭈뼛거리며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메뉴판을 쭉 훑어보며 먹고 싶던 퍼러이 (pho loi)를 찾았다. 방송에서는 빵도 같이 하나 찍어 먹던데 나도 그걸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름을 모르니... 메뉴판에서 제일 가격이 싼 것을 찾고 이건가 짐작하긴 했지만 정확하지 않으니 무작정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내 옆사람이 그 빵을 먹고 있었고 내 머릿속에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까이 나이 라 지? 뜻은 이게 뭡니까? 오르락내리락하는 성조가 참 재밌어서 계속 따라 하며 자연스럽게 외운 문장이었다. 근 7년간 공부한 베트남어, 써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뭐라고 말을 할지 속으로 몇 차례 연습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후! 쫄지 말자!

 

"찌 어이!(언니!)"

"쪼 또이 못 퍼 러이 바 ...까이 나이 라 지?(저 퍼 러이 하나 주시고요, 그리고 이 건 뭔가요?)"

"꿔이.(꿔이에요)"

"쪼 또이 못 까이 나이.(저 이거 하나 주세요.)"

 

내가 대뜸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켜서 당황할 법도 한데 내 옆의 아저씨는 나를 한번 쓱 보더니 태연하게 쌀국수를 계속 먹었다. 나는 그 아저씨에게 하하하하며 머쓱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 대박. 이렇게 말해도 알아듣네! 내 마음속에선 축제가 열렸다. 오, 헛공부한 게 아니었어! 이런 맛이 외국어 공부하는 게 아닌가. 또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잠시 후 기대하던 쌀국수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국수, 이건 자랑해야 돼. 하며 사진을 먼저 한 장 찍었다. 그리고는 국물을 한 숟가락. 와. 이 맛이다! 가끔 한국에서도 베트남이 그리워지면 쌀국수를 종종 먹으러 갔었는데, 역시 현지의 맛이란 그대로 재현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담백하고 깔끔한 소고기 국물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얼른 국수와 고기를 떠서 한 입 맛보았다. 기존의 고기와는 조금 다른 생김새의 아롱사태는 식감 또한 독특했다. 보통 먹는 고기보다는 훨씬 쫄깃쫄깃하고 씹는 맛이 좋았다. 백종원 아저씨가 그렇게 추천한 이유가 있구만. 하노이에서의 첫 식사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함께 나온 꿔이도 먹어보았다. 이 빵(혹은 튀김)은 항상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름을 몰라서 못 먹어본 것이었다. 오늘에서야 드디어 먹어보다니. 그래서 꿔이가 어떤 맛이었냐 하면 사실 별 맛은 안 났다. 그냥 딱 생김새로 봤을 때 예상 가능한 맛이었다. 튀김 그 자체... 그래도 먹어보고 싶었던 걸 먹어서 만족한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보고 흉내 내며 국물과 함께 곁들여 먹어봤는데 꽤 괜찮았다. 오, 이게 또 나름 매력이 있구나 싶었다.

 

아롱사태 쌀국수. 당장이라도 다시 먹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맛있게 먹고 계산을 하러 나갔다. 또 한 번 용기를 내서 바오 니에우 띠엔?이라고 물었는데 당황한 여자 직원이 다른 직원을 보고 뭐라고 얘기를 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그 다른 직원은 저 멀리 있던 어떤 아저씨에게 빨리 오라고 얘기했다. 아마 그 아저씨가 그 가게에서 제일 영어를 잘하는 것 같았다.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뭐라 뭐라고 말했는데 사실 백 퍼센트 알아듣지는 못했다. 얼마냐고 묻자 아저씨는 뭐라 뭐라 말을 했는데 내가 못 알아듣자 메뉴판을 보여주며 숫자를 더해줬다. 이럴 거면 영어 하는 사람이 왜 필요했을까? 가격은 55000동이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아닐수도) 한국 돈으로 치면 2750원 정도이다. 꿔이는 더 저렴했는데 몇 백 원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스몰토크를 시도했다.

 

"엄청 맛있었어요!!"

"그래? 넌 어디서 왔어?"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여행하러 왔어?"
"네, 여행 중이에요. "

 

뭐 이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나는 정말 맛있었다며 엄지까지 들어주고 식당을 나섰다. 이제 어디 가지?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굉장히 똘망똘망해 보이는 소년과 그의 아빠가 다가왔다. 아빠는 아들에게 빨리 저 외국인한테 영어로 말 걸어봐, 하고 부추기고 있었다. 내가 가게 아저씨와 얘기하고 있을 때부터 나를 지켜봤던 모양인데, 아들은 머뭇거리더니 나에게 헬로,라고 말을 걸었다. 딱 우리 반 아이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웃으며 헬로라고 답해주었다. 그러자 그 소년은 딱 교과서에서 배운 듯한 문장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여기에 살고 있고 누구이다. 너는 어디서 왔니? 이런 것들. 내가 한국에서 왔고 난 여행 중이라고 하자 소년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또 다른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저 외국인 여자가 떠날 텐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던졌다.

 

"베트남 음식 중에 추천할만한 게 있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질문을 던져주니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쌀국수, 반쎄오 등의 음식을 나열했다. 대부분은 나도 먹어본 음식이지만 나는 아닌 척 아, 그래? 고마워. 꼭 먹어볼게.라고 답해주었다. 소년은 그 정도면 만족스러운 대화를 한 건지 으쓱해하며 꽤나 만족하며 아빠와 다시 떠났다. 뭔가 나도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타올랐다. 봐봐, 혼자 돌아다니니 이런 재밌는 일도 있잖아. 여행의 시작이 꽤 만족스러웠다.

 

소년과 헤어지고 나는 무작정 걸었다. 이번에는 지도도 없이 그냥 무작정 걸었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걸어봤자 하노이 시내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테니 나중에 길을 잃으면 거기서 택시를 타면 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처음 보는 길거리가 나왔다. 길을 가다가 노점에서 파는 만두(찐빵)를 사 먹기도 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딘가 익숙한 곳이 나타났다. 하노이 중앙역. 나 여기 와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하고 기억을 되짚어보니 2016년 여름에 탕과 버스를 타고 종착역으로 여기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역 앞의 버스 정류장에 내렸었는데. 하노이 중앙역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기에 들어가 구경도 했다. 사람도 기차도 없었지만.그제야 구글맵을 열어보니 내가 꽤 멀리 걸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또 뭐하지? 하다가 떠오르는 한 장소! 바로 롱비엔 다리였다. 롱비엔 다리는 전에 탕의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온 것과 멀리서 본 게 다였다. 롱비엔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앞에 예쁜 카페도 있다고 하니 거기서 경치를 감상하며 커피 한 잔 해야지.

 

좋았어! 이번 목적지는 롱비엔 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