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리뷰/독서

더 셜리 클럽 _ 박서련

728x90
반응형

728x90

더 셜리 클럽 _ 박서련

2021.10.4.



*

“누굴 찾고 있어요?”
거의 완벽한 보라색 목소리였다. 어떤 소리는 색깔로 들린다. 특히 사람의 목소리에는 거의 항상 색깔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목소리들이 한데 뭉쳐서 새카맣게 된다. 나는 보라색을 가장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 보라색이어서 보라색 목소리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보라색 목소리를 좋아해서 보라색이 마음에 들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기 때문이다. 보라색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목이 마른 느낌이 든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심지어 내가 말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목이 타는 기분. (p.28-29)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그 다정한 보라색 목소리가 미웠다. 내가 당신을 기다렸다고 말하다니. 심지어 그게 고맙다고 해 버리다니. 그렇게 말하면 나는 너무 작고 당신은 너무 큰 사람 같잖아요. (p.74)

그렇지만 거기 담긴 곡들을 녹음할 때, 엄마에게 3분 14초짜리 곡을 들여주려고 아빠도 3분 14초를 똑같이 썼을 거예요. 원하는 지점에 제대로 녹음되지 않았거나, 소음이 섞여 들어간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러 번의 3분 14초를 다시 견뎠겠죠. 들려주고 싶은 곡을 고르는 데 드는 시간, 말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같은 걸 빼도 상당한 시간이 들었을 거예요. 나에게 카세트테이프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선물하려 할 때에는 먼저 똑같은, 때로는 더 많은 시간을 써야만 한다는 걸 알려주는 도구.
내게 그게 필요하다는 걸 당신은 알았던 거예요. 그것도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p.90)

내가 당신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 했는지를 나는 킬로미터 단위르 환산할 수 있어요. 당연히 그건 내 마음의 스케일과 디테일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지만,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건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불가능한 정보잖아요. 사실 이건 힌트에 가까운 거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마음을, 느낌을, 측정 가능한 단위에 맡기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압도되게 마련이니까. 압도적인 숫자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마음이 그 뒤에 있다는 걸 누구나 상상할 수 있잖아요. (p.136)

그렇지만 나를 낱낱이 드러낼수록 사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걸 아니까, 정말 사랑받고 싶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배운 적도 없는 사실을 왠지 그때도 알고 있었으니까. 답답했던 건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다 알지만 여전히 생각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사랑받고 싶다고. 이런 나라도 사랑해 줄 수 있어요? (p.155-156)

나는 S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부드럽고 아찔한 보라색. 나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색. 그러니까 S 자신도 모르게 나만의 것이 된 보라색.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목이 말랐다. (p.166)

자연스럽게 S 생각이 났다. 사실은 줄곧 생각하고 있었지만 엄마보다 S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게 죄책감이 들어서 자제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니 안심이었다. S를 계속해서 좋아하고 싶었다. 어쩌면 엄마도 아빠를 바로 이런 식으로 좋아한걸지도 몰랐다. (P.187)

처음 만날 때는 그토록 쉽게 만났는데 왜 두번째는 이토록 어려운걸까요? … 벌써부터 나와 평생을 함께해 달라는 말을 해서 겁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어려운 일인 걸 알아요. 그건 우리 부모님들도 못 한 일이었잖아요. 우리가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래도 이런 상상을 할 때 내가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도 그런지 나는 꼭 알아야겠어요. (p.191-192)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된다. 네가 찾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주는 사랑이 그 사람을 완성해 줄 거다. … 너의 충실한(Your sincere) 셜리 넬슨 (p.199)

사실 어디에서든 좋으니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 …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를 찾아내서 다시 만나고 말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어디에 있었어도 당신 목소리를 보라색이었을 거고 내 이름은 설리였을 테니까. (p.213)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의 지나간 선의가 나를 울리는 것은, 그것이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무능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내가 아주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극미향의 사랑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매번 그렇게 된다. (p.219-220)



**


한국 소설보다는 외국 소설을 좋아했다. 우리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기에 더 공감이 되고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시각도 있지만 나는 허구인만큼 조금 더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나와는 조금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좋았다. 얼마전에 읽은 <달까지 가자>를 시작으로 한국 소설에 조금 재미를 붙였다. 아, 이런 리얼한 이야기도 좋구나, 싶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전에 인스타에서 서평을 본 적이 있었는데 강렬한 표지가 기억에 남아있었다. 사실 그때 서평을 자세히 읽지는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내 취향이었다!

설희, 셜리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대부분 할머니..들의 클럽. 더 셜리 클럽.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든든한 내 편이 생기다니. 부럽다.

S. 중간에 무작정 S를 찾아나서는 대담함과 무모함까지. 진심으로 셜리를 응원하게 됐다. 셜리의 생각은 꽤나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S 또한 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좋았다! 정말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이야기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보다는 딱 적당히 멋지게 마무리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가님이 풀어내는 뒷이야기가 궁금하고 기대되기도 하지만 그냥 딱 예쁘게 마무리된 것 같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져서 찾아봤는데 다른 작품들은 이런 몽글몽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좀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거기서 곁들여졌던 사랑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어서, 아예 본격적으로 사랑 이야기를 쓴 게 이 <더 셜리 클럽> 이라고 한다. 아쉽다. 그래도 다음에 도서관에 가면 작가님의 다른 소설도 찾아봐야겠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