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양곤-4 (1.14.)

휴대폰을 강물에 빠트렸다는 내 말에 묘는 오마이갓이라며 나를 달래주었다. 그때 내 머릿속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 이번 여행을 다 끝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가? 도대체 교장 선생님은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웃기게도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실 나는 2019년 12월에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마음을 바꿔서 돌아온 적이 있다. 갑자기 여행을 파토내고 복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출근을 했을 때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도대체 유럽에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 있냐고 그랬다. 그때 나는 정말 그냥 내 마음이 순간 그렇게 바뀐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그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왜 안 갔냐고 묻는 사람들의 말에 그냥 안 가고 싶었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는데, 당시 교장 선생님은 당신한테만 이유를 말해보라며 엄청나게 궁금해하셨다. 아무튼 이번 여행도 중간에 이렇게 뿅! 하고 돌아간다면 도대체 내 이미지는 뭐가 될까? 하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은 복잡한데 배는 어느새 다시 선착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한국 유심은 숙소에 있다는 거였다. 정말 말 그대로 멘붕 상태로 엉엉 우는 나를 보며 주변의 미얀마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며 궁금해했다. 그러자 묘는 뭐라 뭐라 설명을 해 주었는데 사람들은 나를 아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미 벌어진 일이고 운다고 해서 어떻게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내가 내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은 지나간 일에 대해서, 특히나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정말 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더 이상 슬프거나 울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눈물이 나왔던 것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히려 별 일이 다 있네, 내 인생. 하며 이 상황 자체가 어이없지만 재밌기도 했다.

“묘,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어? 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그래도 여행을 계속하는 게 좋지 않을까?”
“휴대폰이 없으면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는데? 예약도 해놨고, 나는 지도도 필요하고...”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든 여행을 계속하든 너는 폰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우리가 내린 결론은 휴대폰을 구하는 것이었다. 묘는 자기가 잘 아는 중고 휴대폰 가게가 있다며 중고 휴대폰을 사자고 제안했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묘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헤어져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믿을 사람이 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을 해봐도 일단 휴대폰이 있어야 무슨 연락을 하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든 할 것 같아 휴대폰을 사기로 결정했다. 뭐부터 해야 할지 멘붕인 나와는 달리 묘는 침착하게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는 휴대폰 가게로 향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휴대폰도 없이 낯선 외국 남자를 따라간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고 어딘가에 도착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귀중품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나중에 꼭 다시 찾으러 올 테니 팔지 말라고 하는 그런 가게였다. 나는 이런 중고품 가게라 해야 하나? 골동품 가게라 해야 하나? 아무튼 이런 곳을 처음 와봤다. 정신없는 나는 앉아서 기다리고 있고 묘는 주인에게로 가서 뭐라 뭐라 말을 했다.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는지 주인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아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주인을 향해 머쓱하게 웃어주었다.

휴대폰 가게. 이 날은 이 사진을 끝으로 사진이 없다. 카메라를 숙소에 두고왔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 거고 하나는 한국 삼성 거래.”

그러면 난 무조건 삼성! 나는 일본이 아주 싫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일본을 싸잡아 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일본이 싫다. 그렇기도 하고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도 휴대폰을 사용해야 하니까 삼성 휴대폰을 사는 게 합리적이었다.

“근데 삼성건 80만 원이고 일본 거는 40만 원 정도야.”

충격. 중고라며, 중고가 80만 원이라고? (저 때 묘는 달러로 말했지만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내 기억 속에는 한국 원으로만 남아있다.) 한국에서 사는 것과 다를게 뭔가?.. 나는 그만큼의 돈이 없었다. 나는 약 40만 원만 환전을 했었고 저 정도의 돈은 당장 출금할 수도 없었다! 여행 중에 꼭 필요한 카드만 가지고 왔고 돈을 인출하려면 다른 계좌에서 돈을 옮겨야 했다. 그런데 인터넷 뱅킹을 못하잖아. 누구한테 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휴대폰이 없으니까! 오우, 어떡하지.

“카드 돼?”
“미얀마에서는 대부분 카드가 안 돼.”

2차 충격. 어떡하지.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본 폰을 선택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폰은 아니고 중국폰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을 탈탈 다 털면 살 수 있었다. 주인에게 돈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고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아나, 내 돈. 남은 여행은 어쩐다지. 휴대폰을 사서 유심을 끼운다 해도 인터넷 뱅킹은 이용할 수 없었다. 몰라, 일단 복잡한 생각은 미뤄두기로 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가던 중 나는 불현듯 여행자 보험이 떠올랐다.

“아 맞다, 나 여기 오기 전에 여행자 보험 들어놨는데 거기 휴대폰 보험도 있어.”
“오? 진짜?”
“응. 그래서 아마 한국에 가면 돈을 좀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 그러면 너 서류가 필요해.”
“서류?”
“응. 경찰서에 가서 네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는 서류를 제출해야 할 거야.”

묘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나는 단순하게 보험사에 저 폰 잃어버렸어요라고 말하면 되는 줄 알았지 증빙 서류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묘가 또 자기 친구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일을 한다며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도시에서 여행 왔다던 애가 어떻게 이 도시에 이렇게 지인이 많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와, 대박이다 대박. 다행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고 생각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묘는 호텔 직원한테 폰을 잃어버렸다니 뭐 그런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이유도 뭐라 설명을 해줬는데 나는 사실 잘 못 알아들었다. 그 당시에는 뭐 납득을 했던 것 같은데 호텔 직원에게 뭐 이런저런 얘기를 하지 않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서 돈과 한국 유심을 챙겨 왔다. 묘는 호텔 로비에서 나를 기다렸는데 방에 다녀와보니 호텔 직원은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 나 보고는 아무 말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본인은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한 것 같았다. 뭐야. 아무튼 다시 택시를 타고 휴대폰을 사러 갔다. 아, 내 모든 여행 돈을 이 폰에 쏟아부었다. 사실 그 돈도 조금 부족해서 묘가 주인과 얘기해서 좀 깎아주었다.

휴대폰을 받아 들고 켜보았다. 그런데 무슨 이런 휴대폰이 다 있을까? 일단 아까 말한 대로 일본 폰이 아닌 중국 폰이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체제가 아니었다. 구글이 없다니? 휴대폰 어디를 찾아봐도 구글이 없었다. 구글 맵, 플레이 스토어. 이런 익숙한 것들은 없고 중국 앱들이 여러 개 깔려있었다. 빈털터리가 된 나를 위해 묘가 유심 카드를 하나 사서 끼워주었다. (그 폰이 참 신기한 게 유심 카드 2개를 동시에 넣어서 사용이 가능했다. 유심 카드를 2개 끼워서 원하는 카드를 선택해서 쓸 수 있었다.) 일단 휴대폰을 손에 쥐었으니 조금 안정이 되었다. 여행을 계속할지 한국으로 돌아갈지는 이제 생각해볼 문제였다. 가게에서 나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묘가 물었다.

“다행이다, 이제 휴대폰을 샀으니까 너무 걱정 마. 배고프지 않아?”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밝게 말하는 묘를 보니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 혼자라면(물론 그랬다면 그 배를 타지도 않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걸 어쩌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텐데 나를 도와줘서 너무 고마운 마음과 오늘이 생일이라고 했는데 괜히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 모르겠어. 배는 별로 안 고픈데 점심은 먹어야겠지?”
“응, 먹고 힘을 내자. 아, 우리 저기서 밥 먹을까?”

오늘은 정말 별 경험을 다 해본다. 내 생애 처음이었다. 길거리 무료 배식을 받아먹은 것은. 미얀마는 불교 국가가 확실하다. 조금 가다 보니 절에서 나온 사람들이 무료 배식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앉았고 묘가 두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밥을 먹던 사람도, 밥을 나눠주던 사람들도 모두 나를 힐끗거렸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런 광경이 당황스럽죠?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그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고 조용히 밥을 기다리고 앉았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밥과 카레 같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아까 묘가 미얀마 카레를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어찌 됐든 카레를 먹게 되었다. 나는 내가 여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그리고 밥은 정말 꽤 맛이 있었다. 처음 맛보는 미얀마 전통음식이었는데 내 입맛에 꽤 잘 맞았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묘는 어느새 다 먹고는 유심카드에 데이터 좀 충전해서 올 테니 먹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하고 계속 밥을 먹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랬던 걸까, 미얀마 여행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가 바로 이때이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이 혼자 남겨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꿈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오늘 아침만 해도 나는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다. 혼자 남겨지니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중고 휴대폰을 사고 나는 지금 길거리에서 이렇게 절 밥을 먹고 있구나. 정말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구나. 무섭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평온한 내 마음을 알아채고는 좀 놀랐다. 어쩌면 나도 나를 잘 모르고 있었던 걸지도.

잠시 후 묘가 돌아왔다. 사실 나는 묘를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한 10초 정도 했지만 다행히도 돌아왔다. 정말 맛있었던 식사를 제공해준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경찰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