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양곤-3 (1.14.)

술레 파고다 바로 앞의 찻집으로 갔다. 가판대 같은 곳에서 차를 제조하고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는 곳이었는데 에어컨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조금 더 로컬 느낌이 나서 나름대로 좋았다. 이 사람이 뭔가를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 이름은 묘이며(사실 더 복잡했는데 모르겠다. 그냥 묘라고 부르라고 해서 묘라는 이름만 기억한다.) 나이는 나보다 2~3살 어렸던 걸로 기억난다. 묘는 나에게 예쁘다, 어려 보인다 등 칭찬을 했지만 나는 그게 외국 여자에게 으레 하는 플러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잠시 후 주문한 차가 나왔다. 미얀마 밀크티! 드디어 먹어보다니. 놀랍게도 이 더운 날씨에도 뜨거운 차가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밀크티를 뜨겁게 마시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아무튼 처음이었기에 무슨 말도 못 하고 일단 맛을 보았다. 와, 맛있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밀크티(아마도 대만식)와는 좀 달랐다. 일단 훨씬 달콤했으며 우유의 맛이 많이 났다. 대만식 밀크티는 나에겐 조금 가벼운 느낌이었는데 이 미얀마 밀크티는 더 부드럽고 묵직했다. 그리고 의외로 이렇게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먹는 따뜻한 밀크티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으로 마셔 본 미얀마 밀크티. '러펫예' 이런 발음인 것 같다. 근데 난 라페이예라고 부른 적도 있고 내 맘대로 그냥 비슷하게 불렀다. 아직도 정확한 발음은 모른다.

“오늘 뭐 해?”
“나는 오늘 저녁에 일행 만나기로 한 거 말고는 다른 일은 없어.”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5시”
“그럼 그때까지 나랑 같이 다닐래?”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뭐지? 하면서 의심 먼저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와, 로컬 사람과 같이 여행을!? 대박대박, 나한테 이런 행운이? 이런 생각만 했다. 머릿속이 꽃밭이었지. 나는 흔쾌히 그래-.라고 말했고 그렇게 우리는 그 날의 동행이 되었다. 그리고 묘는 ‘사실은 오늘이 내 생일인데.’라며 자신의 생일에 함께 다녀줘서 고맙다는 것을 이후에도 몇 차례 언급했다. 차를 마시고 우리는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사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다녔다. 뭐, 현지인이니 나보다는 잘 알겠지? 내가 모르는 장소들에 데려가 주겠지? 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곳에도 많이 갔다. 미술 갤러리에 가서 작품들을 구경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매장도 구경을 했다. 우체국의 구석구석을 구경하기도 했다. 내가 그의 설명을 모두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우편물을 분류하는 모습을 내가 본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힌두교 사원인데 불교 국가에서 힌두교 사원을 만날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힌두교라는 종교는 교과서에서만 봤지 내 일상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힌두교 사원에 들어가자 확실히 ‘오 이게 힌두교!?’하는 느낌이 확 왔다. 파란색 신이 있었으며 불교나 기독교의 그 모습과는 달랐다.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술레 파고다 옆의 광장

힌두교 사원. 확실히 불교와는 다른 느낌이다.

미술 갤러리

우체국의 2층. 뭐라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나는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점심은 언제 먹는 거야. 이제 그만 보고 싶고 점심을 먹고 싶었지만 묘에게 말할 수 없었다. 뭐, 때 되면 먹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묘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카레 좋아해?”
“응.”
“미얀마 카레 먹으러 가자.”

와, 드디어 점심!

“그런데 너 그거 알아? 이 지역은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투어리스트 플레이스(tourist place)야. 너 현지인들이 아는 로컬 플레이스 가보고 싶지 않아?”
“오, 좋지?”
“그래? 그럼 배를 타고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내가 구경시켜 줄게. 같이 가자.”
“좋아. 5시까지 돌아올 수 있는거지?”
“응”

와, 이게 무슨 행운이람. 그렇게 나는 묘를 따라 배 선착장으로 갔다. 가서 이름을 적고 티켓을 샀다. 편도가 4,000짯이었는지 왕복이 4,000짯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왕복표를 사고 배를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았다.

“그런데 우리 저 쪽에 건너가면 택시를 빌려서 다녀야 해. 차 없이 돌아다니기 힘들거든.”
“아, 그래? 얼만데?”
“한 시간당 20달러 정도일 거야.”
“20달러? 우리 몇 시간 정도 빌려야 하는데?”
“한 2~3시간?”
“...음. 나 그 정도의 돈이 없는걸? 너무 큰돈이야.”

나는 40만 원 정도를 환전했다. 나름대로 철저한 나의 예산 계획에 따른 것이었는데 오늘 하루에만 40~60달러를 쓰자고? 너무 크고 부담스러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나는 여행자고 오늘이 내 여행의 첫날이야. 이 돈을 오늘 써버리면 난 남은 여행을 할 수가 없어.”

그러자 묘와 묘의 친구로 보이는 직원이 깎아주겠다며 나를 몇 차례 설득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제야 나는 뭔가가 잘못되고 있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내가 승낙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묘는 그럼 배 표를 샀으니 강을 건너갔다가 그 주변만 한 번 둘러보고 바로 돌아오자고 했다. 묘가 나를 위해 이해심을 발휘해준 것 같아서 고마웠다. 표를 산 김에 다녀만 오자라고 생각하고 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아주 커다란 배가 도착했는데 나의 예상과는 다른 배였다. 나는 배라고 하길래 방콕, 파리에서 탄 유람선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완전 현지인들만 타는 수송선이었다. 관광을 위한 유람선이 아니라 정말 사람을 이동시켜주는 운송 수단! 이게 뭐지? 하는 생각 반, 와, 진짜 로컬 지역인가 보다하는 설렘 반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 쪽으로 몰려갔다. 나와 묘도 사람들 틈에 섞여 배에 탑승했다. 배는 2층짜리였는데 그 배에 탄 외국인은 나를 포함해 겨우 3~4명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좋지 않아 보였다. 못 사는 동네인가? 아니면 저쪽 지역이 정말 관광지역이라서 깔끔해 보였던 거고 이게 미얀마의 생활수준에 더 가까운 건가? 하고 생각했다. 나와 묘는 2층에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묘가 나를 배려해서 경치를 감상하라고 배 난간 쪽을 양보해주었다. 하지만 딱히 감상할만한 경치는 아니었다. 그냥 흙이 자욱한 강이었기 때문이다. 흙탕물이었다. 잠시 후 배가 출발을 했고 잠시 주변을 구경하던 나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배를 얼마 정도 타야 하냐고 물으니 10분 이내라고 대답해주었다. 이 틈을 타서 휴대폰을 충전해야지 싶어 보조배터리와 폰을 연결하고 폰을 만졌다.

승선하는 사람들, 그리고 배에 올라타면 보이는 광경.

나는 원래 휴대폰에 젤리 케이스를 끼워서 쓰는 편이다. 그런데 이 여행을 가기 얼마 전에 갑자기 하드 케이스를 너무 사고 싶어서 빨간 배경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대사를 넣은 제작 케이스를 주문해서 꼈다. 하드 케이스는 젤리 케이스보다 훨씬 미끄러웠고 나는 한국에서도 몇 번 손에서 미끄러져 폰을 놓친 적이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쉽게 적응하는 동물은 아닌가 보다. 이 미끄러움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도 폰을 만지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손에서 미끄러진 휴대폰은 보조 배터리와 연결된 usb선에서 힘없이 툭-하고 빠졌고... 떨어졌다.


와, 다행이다.

휴대폰이 떨어졌다. 바닥에. 휴, 십 년 감수했네. 스스로에게 ‘정신 차려라.’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심장 떨리는 순간이 지나고 배가 반대편에 도착했다. 오늘은 정말 놀람의 연속이다. 이게 뭐야? 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뭐지 싶었다. 이렇게 빈민가, 못 사는 동네에 구경할 게 뭐가 있다는 거지!?

배를 타고 건너간 반대편. 무서웠다.

배를 타고 건너온 반대편은 출발했던 곳과는 180도 달랐다. 그곳은 흙먼지가 가득했고 호객 행위를 하는 택시 기사들이 우리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믿을 건 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느낀 건 무서움이었다. 여기서 잘못되었다가는 세상에서 내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 묘와 나는 약속한 대로 그 주변만 잠깐 둘러보고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고 앉아있는데 얼른 밥을 먹고 싶었다. 배를 타고 다시 저 쪽으로 돌아가면 점심 먹자고 꼭 말하겠다 마음을 먹었다.

 

묘만 따라갔다.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배 선착장으로!

묘는 저렇게 대놓고 계속 통화를 했다.

아, 그리고 묘는 배를 타서부터 계속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이건 묘에게 기분 나쁜 부분이었는데 아마 친구와 통화를 하며 나 지금 한국인 여자애랑 다니고 있어~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사람을 옆에 두고 뭐 하는 거지하고 생각을 했다가 그래, 뭐 자랑하고 싶겠지. 하는 마음이 들어 신경을 안 썼다. 그런데 묘는 은근슬쩍 휴대폰의 카메라를 내 쪽으로 비추기도 했고, 나와 사진을 찍자고 한 후 그 사진을 보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묘가 조금 불편해졌다. 얼른 저 쪽 지역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밥을 먹고, 아니면 밥을 먹기 전에 그냥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돌아가는 배에 올라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난간 쪽에 앉았고 묘는 친구와 계속 이야기 중이었다. 참 내가 별 경험을 다 한다, 생각하며 다시 보조배터리와 폰을 연결했다. 그리고는 아까와 같이 휴대폰을 만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후회의 동물인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고 모름지기 큰 일을 당할 뻔했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거늘. 나는 아까 그렇게 폰을 놓칠 뻔해서 심장이 철렁했으면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결과는 뻔하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강물에.

“아, 안돼!!!”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거나. 충격적인 일들은 그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고 한다. 휴대폰이 아주 천천히 물속으로 빠졌다. 나는 이런 경험은 정말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안돼!라고 소리를 질렀고 깜짝 놀란 묘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엉엉 울며 겨우겨우 답을 했다.

“나.. 휴대폰이 저 강물에 빠졌어...”


본격적인 미얀마 여행 첫날. 휴대폰을 잃어버렸다.